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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zidenz Grotest(악치덴츠 그로테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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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zidenz Grotest
what 악치덴즈 그로테스크
when 1896년
where 독일 베르톨트(Berthold) 사
why 19세기에 등장한 산세리프 서체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조형적 완성도를 성취
who 디자이너 미상(未詳)



그로테스크·네오 그로테스크 산세리프 스타일
Grotesque·Neo-Grotesque Sans

세리프가 없는 서체가 서체 견본집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16년이었다. 19세기 태생의 초기 산세리프 서체들은 ‘그로테스크’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글꼴이 생소하고 특이하다는 반응에서 연유한 것 같다. ‘그로테스크’ 서체들은 글자의 부분에 따라 굵기의 차이가 있었으며 곡선으로 끝나는 부분의 처리가 미숙하였다. 대부분 조형적 완성도가 떨어졌으나 1900년대에 미국에서 모리스 벤튼(Morris F. Benton)이 디자인 한 ‘프랭클린 고딕(Franklin Gothic)’, ‘뉴스 고딕(News Gothic)’등, 이름에 ‘고딕’이 붙은 서체들에 와서는 산세리프 서체로서의 조형적 안정감이 확보되었다. 네오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 양식을 발전시킨 산세리프 양식이다. 이 양식의 산세리프 서체들은 굵기의 일정함이나 글꼴에서 보이는 형태적 완성도가 뛰어나고 대부분 체계적인 패밀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악치덴즈 그로테스크(Akzidenz Grotesk)’는 1896년에 등장하였지만 글자의 폭과 굵기가 매우 일정하고 통일성 있는 패밀리를 구성하고 있어 완성도 있는 타이포그래피를 가능하게 하였다. 악치덴즈 그로테스크는 동시대의 산세리프 서체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조형적 우수성으로 네오 그로테스크 양식을 규정하였으며 ‘헬베티카(Helvetica)’, ‘유니버스(Univers)’와 같은 네오 그로테스크 산세리프 서체들의 모체가 되었다.

신 타이포그래피의 전통을 잇는 서체
디자이너의 개인적 성향이 드러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이면서 우수한 조형성을 가진 산세리프 서체라는 이유로 악치덴즈 그로테스크는 신 타이포그래피의 서체로 선택되었다. 신 타이포그래피의 주창자 얀 치홀트(Jan Tschichold)는, 과거와 결별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서체는 산세리프 서체뿐이라고 강조하고, 1928년 자신의 저서 〈신 타이포그래피〉의 본문용 서체로 악치덴즈 그로테스크를 사용하였다. 1933년 나찌의 방해와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으로 독일의 모던 디자인 운동이 여러 국가로 흩어지게 될 때 신 타이포그래피의 정신은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한 테오 발머(Theo Ballmer)막스 빌(Max Bill)과 같은 스위스 디자이너들을 통해 이어졌다. 이들에게도 악치덴즈 그로테스크 사용의 전통은 이어졌으며 같은 정신을 공유하는 디자이너들 사이에 악치덴즈 그로테스크의 사용은 서로를 확인하는 일종의 코드(code)였다.

1950년부터 56년까지 막스 빌은 바우하우스의 교육적 이상을 재현하고자 설립된 독일의 울름(Ulm) 조형대학의 학장을 역임하면서, 수학적 접근에 의한 순수한 형태의 추구와 아름다움이라는 그의 미학을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통해서 전파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의 바젤(Basel)과 취리히(Zurich)를 중심으로 모던 디자인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스위스 모더니즘은 정보의 객관적이고 명확한 전달이라는 목표의 수행을 위해 중립적이고 분명한 목소리를 가진 산세리프 서체를 사용하고, 화면의 구성에 있어서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그리드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1950, 60년대에 에밀 루더(Emil Ruder), 아민 호프만(Armin Hofmann), 요셉 뮬러 브로크만(Josef Muller Brockmann) 등에 의해 전개된 스위스 모더니즘은 신 타이포그래피의 전통을 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악치덴즈 그로테스크를 그들의 작업에 사용하였다.

스위스 모더니즘의 산실(産室)이었던 바젤 디자인 학교(Basel School of Design)는 1968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27세의 신임 교수 볼프강 바인가르트(Wolfgang Weingart)는 그가 받은 스위스 모더니즘 교육에 의문을 품고 이를 동기삼아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형태 창조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실험에 열정을 쏟았다. 스위스 모더니즘의 ‘차갑고 중립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실험적이고 자기표현적인 접근’을 통해 각자의 목소리를 가질 것을 학생들에게 교육했다. 바인가르트 개인의 타이포그래피 작업과 교육은 급진적이었으나 그가 받은 모더니즘 교육의 커다란 테두리 속에서, 발달한 기술과 시대에 맞게 모더니즘의 형태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더니스트와 같이 하나의 작업에 하나의 서체 패밀리만을 사용했으며 그의 타이포그래피 실험의 주재료는 악치덴즈 그로테스크였던 것이다.

이 서체 처음 접할 때부터 왠지 딱 떨어지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가끔 쓰기 좋아하기는 하는데,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진 않은 거 같은데 그래서 더 좋아하는지도..폰트에도 역사와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좀 더 많이 알고 싶다.